마음이 흐트러지는 날에 산사에서 만나는 눈부신 고요와 적멸의 순간들이 한 권의 책에 스며들어 있다. 이산하 시인이 펴낸 <피었으므로, 진다>에는 5대 적멸보궁, 3보사찰, 3대 관음성지를 포함한 우리나라의 이름난 고찰들이 망라되어 있다. 이 한권의 책만으로도 만족스런 산사 기행이 되기에 충분해 보인다.
시인답게 문장이 예사롭지 않다. 탐미적 허무주의 시인의 현란한 감성과 정제적 시적 사유가 돋보이는 섬세한 자기 내면 기록이라는 정호승 시인의 평이나, 섬세한 문장과 문장 사이에 놓인 촘촘한 직관의 그물은 바람의 형체를 건져내 보여주는가 하면, 눈부신 고요가 빚어내는 꿈결 같은 소리들도 우리한테 들려준다는 안도현 시인의 평가가 헛된 것이 아님을 이 책을 읽다보면 느끼게 된다.
그래서 조금은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시인의 글이라 평범하게 읽여지지는 않는다. 김주대 시인은 산문이라고는 하나 행간까지도 캄캄한 고뇌가 있어 고결하다고 그의 글을 평했는데, 안타깝게도 지혜로운 독자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탓에 이 유려한 산문지 도처에 고여 있는 수천 편의 시를 덤으로 읽을 수는 없었다.
이 책에는 모두 스물 일곱 곳의 사찰과 암자가 소개되어 있다. 땅끝 해남의 미황사에서부터 여전히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가장 장엄한 팽목항법당에 이르기까지 모든 절에서 이산하 시인은 문장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알려주고 있다.
여전히 고요와 적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나는 그저 넌지시 짐작만 할 뿐이다. 나 역시도 호젓하게 혼자일 수 있는 절을 좋아하고, 절에 이르는 숲길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종교적 성찰의 단계에 이르지 못했기에 그저 절과 그 절을 품어 안고 있는 산이 주는 아름다운 풍경에 그저 탄복할 뿐, 시인의 글에 100% 공감할 수 없음은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다.
또 하나, 절을 소개하는 사진이 없다는 것도 이 책을 읽으며 느낀 아쉬움 중 하나다. 군데군데 여러 훌륭한 작가의 작품들이 소개되어 있긴 하지만 절과 숲, 그리고 스님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통해 그 절만의 느낌을 미루어 짐작해보고 싶었던 나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책에 소개되어 있는 스물 일곱 곳의 절과 암자 중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몇 있다. 시간 날 때마다 우리땅 구석구석에 보석처럼 자리하고 있는 절집을 찾아다니고 있긴 하지만 그 여정의 끝이 언제일지 짐작조차 어렵다. 아마츄어 사진가의 시선을 탈피해 시인의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길 기대해 본다. 끊임없이 걷다 보면, 쉼없이 쓰고 다듬다 보면 기적처럼 그런 날이 올 지도 모를 일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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