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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의 耽溺

풍경을 그리다 머리말

by 푸른가람 2023.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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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니라.

유홍준 교수님이  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란 책을 통해 접하게 된 말이다. 이 짧은 글귀가 마치 정수리를 꿰뚫고 지나는 것처럼 선명한 울림으로 다가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사진이란 걸 취미로 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남들이 좋다고 하는 곳들을 여러 곳 다녀보게 된다. 어떤 곳은 “역시 좋구나. 먼 길을 마다않고 오길 잘했다.”며 만족스러울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허다하다. 

괜찮은 여행지를 추천해 달라는 부탁에 주저하다 몇 군데를 일러주고 나면 괜스레 조바심이 나기도 한다. 때가 다르고, 빛과 바람과 하늘이 다르고, 또 함께 한 사람이 다를테니 같은 장소에 있다고 해서 같은 마음일 순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나와 같지 않은 누군가에게 어떤 장소나 사물, 사람을 소개하는 일은 매번 어려운 일이다. 

애써 고민해서 추천해 준 사람을 원망하는 마음이 생길 때면 난 항상 유홍준 교수님의 이야기를 떠올리곤 한다. 내가 아직은 사랑하는 마음이 덜 해서, 많이 보질 못하는 것이겠거니 그렇게 말이다. 나의 안목에 실망했을 지도 모를 그 누군가 역시 그래줬으면 좋겠다.

비단 여행 장소에만 국한되는 얘기는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고, 물건도 매한가지다. 내가 아닌, 어떤 대상을 사랑하게 되면 자연스레 관심이 생기고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지는 법이다. 그저 허투루 보아 넘겼던 소소한 모습들 속에서 감쳐져 있었던 진면목을 발견하게 되면 그는 내게로 와 비로소‘꽃’이 된다.

하지만 그 꽃이 반드시 화려한 장미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외진 산기슭에 남모르게 피었다 저 홀로 외로이 지고 마는, 혹은 들판에 지천으로 피어 나는 이름 모를 들꽃이라도 좋을 터. 투박하고 모자람이 많지만, 사랑으로 바라보면 알게 될 것이요 결국엔 보이게 될 것임을 믿어 본다.  

왜 이토록 부질없는 짓을 저질렀냐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난 ‘꿈’을 이루고 싶어서라고 말하겠다. 여러 인연 덕분에 사진을 찍게 됐고, 여행을 떠나게 됐고, 여행지에서의 느낌을 글로 남기게 됐다. 이름난 작가의 책들도 찾아 읽어보게 됐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욕심이 생겼다. 죽기 전에 내가 찍은 사진과 글로 채워진 책을 만들고 싶다는 꿈이 황무지 같았던 중년 남자의 가슴에 열정이라는 새싹을 돋아나게 만들었다. 

여전히 누군가에게 보여주긴 턱없이 모자란 글이고 사진이다. 그럼에도 부끄러움을 무릅쓸 수 있었던 것은 미루기 싫어서다. 좀 더 사진을 잘 찍게 되면 그때, 남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게 되면 그때나. 이렇게 미루다보면 후회하면서 돌아갈 것 같아서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를 알고 오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가 다시 돌아갈 날도 미리 알 순 없다. 

또 모르는 일 아닌가. 하루하루 꿈을 이루기 위해 살다보면 정말 죽기 전에 제대로 된 책 하나 만들 수 있을 지도. 혹시 모를 그날을 위해 나는 또 길을 나선다. 숨을 멈추고 카메라 뷰파인더를 응시한다. 풍경을 그린다. 그 풍경 속에서 그대를 그린다.


2014년 5월 어느 햇살 좋은 날에
輝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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