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시절부터 좋아하는 책과 음악만 잔뜩 쌓아놓고 홀로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개인주의자였다. 요령껏 사회생활을 잘 해나가는 편이지만 잔을 돌려가며 왁자기껄 먹고 마시는 회식자리를 힘들어하고, 눈치와 겉치례를 중요시하는 한국의 집단주의적 문화가 한국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믿는다. 판사가 스스로 개인주의자라고 하다니 뻔뻔스럽다고 여길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구에서 발전시킨 민주주의 법질서를 공부하고, 이를 적용하는 일을 오랫동안 해온 법관에게 개인주의는 전혀 어색한 말이 아니다.
개인주의는 유아적인 이기주의나 사회를 거부하는 고립주의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사회에는 공정한 룰이 필요하고, 그로 인해 개인의 자유가 일정 부분 제약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개인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위해 다른 입장을 가진 타인들과 타협하고 연대해햐 한다고 믿는다. 집단 내 무한경쟁과 서열싸움 속에서 개인의 행복은 존중되지 않는 불행한 사회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이민'만은 아닐 것이라고 믿으며, 감히 합리적 개인주의자들의 사회를 꿈꾼다.
책 첫머리에 나오는 지은이 소개다. 간략하지만 이 소개글만으로 이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지은이가 지향하는 바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개인주의자 선언>이란 책은 현직 부장판사로 재직중인 문유석 판사가 지금껏 우리 사회를 지켜보면서 느낀 점을 담담하게 써내려 가고 있다. 냉철한 분석을 하고 있으되, 진단과 해법까지 차가운 것은 아니다.
지금 대한민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 이토록 힘든 이유에 대해 저자는 집단주의적 문화 탓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조선시대 들어 성리학만이 나라에서 존중하는 유일한 학문이 되었고, 왜란과 호란을 겪은 뒤로는 충효 이념과 신분제적 질서 유지에 철저했던 예학이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면서 우리 사회의 자유도는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기존과 다른 해석을 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사문난적'으로 처형당했고, 신분 해방을 꿈꿨던 수많은 이단자들 역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전적으로 일치하지 않지만 나의 성향 역시 그를 닮았다. 우리 사회의 수많은 갈등과 산적한 현안들이 오직 국가주의 문화 때문 만은 아니겠지만 상당 부분은 그 기저에 오래된 괴물이 또아리를 틀고 있음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괴물은 개인의 유연한 사고를 저해하고, 합리적 개인주의에 기반한 건전한 공동체 형성에도 큰 장애 요인이다.
특히나 이념과 지역 등 수많은 대결 구도로 점철된 편 가르기 또한 집단주의의 폐해다. 한쪽은 수구꼴통, 다른 한쪽은 종북좌빨로 상대에게 색깔을 덧씌우고 증오한다. 과거에는 호남을 소외시키더니 요즘은 영남이 따돌림을 당하는 형국이다. 나와 생각이 다르면 그 차이를 인정하면 그만일텐데, 타도해야 할 적으로 간주해서 씨를 말리려 한다. 한 사회가 오로지 하나의 이념과 사상만으로 움직인다면 얼마나 무서운가.
3부에 걸친 그의 글들은 여러 번 곱씹어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 싫으나 좋으나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이로 인해 다양한 충돌과 갈등이 생기는 것 또한 당연한 이치다. 생각의 차이, 가진 것의 많고 적음, 다양한 출신지역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문유석 판사가 강조한 합리적 개인주의가 필요한 이유다. 보다 큰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다수의 이익을 내세워 사회적 약자의 아픔에 눈 감는 현실이 더 이상 지속된다면 우리 사회가 온전히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한상궁 마마님이 장금에게 했던 것처럼 "네 능력은 뛰어난 것에 있는 게 아니다. 쉬지 않고 가는데 있어"라고 격려해 주면서, 끝에는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겠어"라며 알아주는 마음. 지금 우리 서로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마음일 것이라는 그의 생각에 동의하며 나 또한 합리적 개인주의자들의 사회를 함께 꿈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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