꼿꼿해 보이는 외모에 또렷한 음성, 움직임은 차분했으며 엄중함이 있었다. 이미 고인이 된 지 오래인 정운영 선생에 대한 내 기억의 단편이다. 그 기억마저도 TV 토론 프로그램 진행자로서의 모습일 뿐이니, 1년에 한번 돌아오는 생일 선물로 주어지는 책을 정운영 선집 <시선>으로 고른 것은 어떤 인연 때문이었을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의 풍모가 <시선>이란 책에 담긴 수많은 글에서도 진하게 느껴진다. <시선>은 지난 2005년 세상을 떠난 정운영 선생의 글 모음집이다. 1944년 온천으로 유명한 충남 온양에서 태어난 그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덕분에 교수가 되었지만, 민주화 투쟁에 연루되어 해직된 이후 여러 대학에서 경제학 강의를 이어갔고, 한겨레신문과 중앙일보의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그의 화려한 약력 속에서 언뜻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언론사의 이름이 나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신문이야 그의 삶과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겠지만, 3대 보수언론의 한 축을 맡고 있는 중앙일보 논설위원으로 일했다는 것은 진보의 맏형 역할을 했던 사람이 수구꼴통의 혀와 같은 역할을 했다는 것 아닐까. 지금으로 치면 마치 손석희 교수가 종편인 JTBC로 자리를 옮긴 것과 같은 놀라움과 마찬가지다.
정운영 선집 <시선>에는 생전에 그가 남긴 주옥같은 글들이 담겨 있다. 주로 한겨레신문과 중앙일보 칼럼으로 실렸던 글들이 대부분이지만 이따금씩 회사 사보에 실린 그리 무겁지 않은 글들을 읽어보는 느낌도 나쁘지 않다. 경제학자라는 본업을 속일 수는 없었는 지, 일그러진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반성도 아끼지 않고 있다.
이 책은 조정래 작가의 추도사로 시작된다. 그 분량만 해도 스물 네 페이지에 달한다. 어떤 책에서도 이런 스타일의 편집을 본 적이 없다. 조정래 작가의 유려한 추도사 '영생하는 영혼의 소유자' 덕분에 살아 생전 정운영이란 존재를 몰랐던 사람들도 충분히 그의 깊은 내면까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정운영 선집 <시선>의 글들이 어떤 이에겐 다소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자본주의와의 경쟁에서 완패해 이미 화석이 되어 버린 사회주의에 대한 아쉬움이 곳곳에 묻어 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그가 1993년 2월 18일에 쓴 <내 자식의 '교환가치'만은>이란 글에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게 된다. "진정으로 자식의 장래를 생각하거들랑 부디 모든 부모들은 사람으로써의 사용가치를 상품으로서의 교환가치에 앞세우라"는 정운영 선생의 일침은 이데올로기와 경제 시스템이 과연 무엇을 향해야 하는 것인가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한다.
'책읽는 즐거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의를 부탁해 - 권석천의 시각 (0) | 2015.12.03 |
---|---|
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0) | 2015.11.27 |
하루여행- 당신에게 주는 선물 (0) | 2015.11.26 |
언제 들어도 좋은 말 - 이석원 이야기 산문집 (0) | 2015.11.24 |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 어느 젊은 시인의 야구 관람기 (0) | 2015.11.23 |
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 - 한줄기 희망의 빛으로 세상을 지어라 (2) | 2015.11.09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8 - 강물은 그렇게 흘러가는데 (2) | 2015.11.05 |
좋아하는 철학자 있으세요? - 인기 철학자 67명이 한 권에 모였다 (2) | 2015.09.29 |
역사 그리고 문화, 그 삶의 흔적을 거닐다 - 호기심 많은 방랑객의 당돌한 여행기 (0) | 2015.09.23 |
밤 열한 시 - <생각이 나서>, 그 후 삼 년 동안의 이야기 (2) | 2015.09.1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