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성과'라는 단어가 익숙한 지 오래 됐다. 각 조직들은 훌륭한 성과를 내기 위해 조직을 정비하고, 인력을 효율적으로 배치하고, 세밀한 스킬을 갖추려는 노력을 쉼없이 경주한다. 과거 시대는 결국 성과사회로 차근차근 옮겨 왔고, 말 그대로 과거에 비해 엄청나게 큰 '성과'를 올릴 수 있게 됐지만 성과사회를 사는 사람들은 불행히도 피로감에 무력감에 빠지고 있다.
성과사회가 근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목표 지향성은 필연적으로 경쟁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또한, 개인간, 조직간의 치열한 경쟁은 당연히 피로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결국 성과사회가 피로사회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마련이다. 확연한 차이가 있다면 과거에는 경쟁을 타율적이고 피동적인 것으로 봤다면 성과사회에서는 이를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타율적인 삶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성과를 이루기 위한 경쟁을 당연스러운 것으로 받아 들임은 물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경쟁에 스스로 뛰어든다고 여긴다. 자신은 결코 누군가에 의해, 혹은 사회가 짜놓은 프레임에 얽매인 삶을 살지 않는다는, 일종의 자기 암시를 거는 셈이다.
하지만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가. 설령 그것이 자발적인 의사에 의해, 경쟁을 즐기듯 능동적으로 뛰어든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유발되는 피로는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 심리적인 면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 몰라도 그 어느 누구도 경쟁의 부산물인 피로를 회피하거나, 자유로울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은 이러한 현대 성과사회의 현실을 '긍정성의 과잉'이란 표현으로 진단했다. 이질성과 타자성의 소멸로 인해 면역학적 의미에서 타자가 불러 일으키는 공포와는 구별되지만, 시스템 자체에 내재함으로 인해 면역적 저항을 유발하지 않는 '내재성의 테러'는 긍정성을 포화 상태로 만들어 결국 고갈시키는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고 본 것이다.
이 책은 현대사회의 성과주의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비판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2011년 독일에서 가장 많이 읽힌 철학책으로 알려져 있다. 독일의 주요 언론이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의 고찰을 격찬했다고 하지만, 철학적 성찰이 부족한 일반인들이 읽기에는 참으로 난해한 책이라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있기는 하다. 시대마다 그 시대의 고유한 질병이 있는데 현대는 이미 바이러스의 시대를 넘어 소진증후군,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와 같은 정신 질환이 주류를 이루게 됐고, 이런 심리 장애의 원인이 오늘날 성과사회의 바탕에 깔려 있는 전반적인 패러다임 전환의 결과로 해석된다는 그의 진단은 눈여겨 볼 만 하다.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성과사회의 주체가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으며,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란 것이다. 자기 착취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기본 작동 원리로서 타자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더 많은 성과를 올리게 하지만, 결국 이런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자기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 참으로 무시무시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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