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이 책을 골랐을 때는 역사를 다룬 책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읽다 보니 역사가 아니라 사관에 대한 심각하고도 투지 넘치는 호전적인 글이 담겨 있었다. 원래 읽고 싶던 것은 아니었지만 평소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분야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보게 될 기회가 된 것은 어찌보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우암 송시열이라는 인물로 대표되는 노론. 그들은 몇차례의 피비린내 나는 사화를 거치고 목숨을 내놓고 싸워야 하는 치열한 권력 끝에 조선시대 후기를 주도하는 유일무이한 권력 집단이 되었다. 그리고 이후 300년의 우리 역사는 노론의 역사였고, 불행히도 자존이 결여된 의존의 역사였고 민초들에게는 지옥과도 같은 역사가 되었다.
저자 이주한의 주장대로 노론은 주자학을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사상으로 받들어 양명학을 이단으로 만들었고, 수많은 천주교도를 서학쟁이로 도살했으며, 위로는 임금을 독살하고 아래로는 신분제를 강요해 백성을 노예로 만들었다. 그는 조선후기를 '노론 천국, 백성 지옥'이라는 사뭇 원색적인 표현으로 규정하기까지 했다.
물론 노론이라는 정치 권력을 100% 비난할 수는 없다. 저자의 주장이 모두 사실이라고 볼 역사적 근거도 어떤 부분에서는 부족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명에 대한 철저한 사대주의는 이후 병술국치를 맞아서는 일본에 대한 사대로 뒤바뀌었고, 나라를 스스로 내어 준 그들은 새로운 나라에서까지 철저히 주도권을 놓치 않았다.
그로 인해 노론 사관은 일제의 식민 사관으로 그대로 이어졌고 우리는 지금도 그 사관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원래부터 중국의 식민지였던 우리는 시시때때로 주변 강대국들의 속국이었고 지금의 강국인 일본에 굴복하여 사는 것은 우리들의 숙명이니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들의 역사 인식이었으니 우리 민족의 자존감에 대한 배려는 찾아볼 수가 없다.
나도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이 많았었다. 물론 시험공부의 한 방편이기도 했지만 대학 들어가자마자 가장 권위적인 우리 역사에 대한 저서라고 샀던 책이 바로 이기백의 '한국사신론'이었다. 언제쯤 그 책이 버려졌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지금도 그 표지만은 기억이 난다. 그 무렵 증산도 관련 책을 함께 보고 있던 내게 이기백의 역사 인식은 서글픔 그 자체였다.
물론 그 이전의 학교 교육에서 배워왔던 틀에서 벗어나진 않는 내용이었지만 그의 스승인 이병도의 역사 인식을 철저히 따르고 있는 그들에게 자라나는 세대의 역사 교육을 맡긴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실증주의적 연구에 기반한다는 명목으로 그들은 규명이 곤란한 우리의 고대사를 철저히 왜곡하고 훼손했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모든 권력은 역사를 통제하고 조작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도 지배한다." 맞는 말이다. 그것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권력의 속성이기도 하다. 우리가 중요한 사료로 자주 인용하고 있는 모든 사서들이 그러한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엄연히 왜곡이 있고 곡학아세가 많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서를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물론 식민 사관은 분명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다. 하지만 민족적 자긍심을 고양하기에 급급한 사관들도 무턱대고 신봉해서는 안 될 일이다. 신채호 선생이 조선상고사에서 밝히고 있듯 역사는 역사를 위하여 지으란 것이요, 역사 이외에 무슨 딴 목적을 위하여 지으라는 것이 아니다. 역사학자들은 진실만을 얘기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될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사실이 아니라고 알고 있는 것들을 믿어 놓고는
나중에 그것이 잘못이라고 밝혀지면 뻔뻔하게도
자신이 옳았음을 입증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할 수 있다.
지적으로는 이 과정이 한없이 계속될 수도 있다.
이를 제지할 유일한 요소는 잘못된 믿음이 머지않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에, 대개는 전장에서 맞닥뜨리는 것이다. - 조지 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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