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란 것이 이래서 참 좋은 것 같다. 이제는 고인이 된 분의 체취를 이렇게나마 뒤늦게 책을 통해서 맡을 수 있으니 말이다. 故 박완서 선생님의 기행 산문집 '잃어버린 여행가방'은 지난 2005년에 초판이 발행되었다. 한참이나 늦게 이 책을 사게 된 것은 순전히 여행 에세이를 좋아하는 내 취향 탓이었다.
문필로 치자면 국내 어느 작가에게도 뒤질 것이 없느니만큼 과연 그 분은 여행을 통해 어떤 것을 느꼈을까가 무척 궁금했다. 일반인 혹은 여행작가가 아닌 순수 문학인의 손끝에서는 얼마나 주옥같은 작품이 탄생할까 기대도 사실 컸다. 이 책은 박완서 선생님이 평소 즐겨 찾던 국내 여행지와 몇차례의 해외 여행에서의 소회를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다.
언제나 그랬듯 역시 아름다운 우리땅의 여행 기록에 눈길이 간다. 남도, 하회마을, 섬진강, 오대산 등은 나 역시도 몇차례 다녀온 곳들인지라 작가의 눈과 발길을 따라 내 마음도 함께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지금도 눈 감으면 남도의 포근한 산자락과 황톷빛 땅이, 섬진강 악양들의 누렇게 넘실거리는 가을 들녘이 선하게 그려진다.
사람의 감성은 누구나 비슷한 가 보다. 내가 느끼는 것을 그도 느끼고, 내가 감동해마지 않았던 풍경이 그의 마음에도 잔잔한 울림을 남겼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낀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공감할 수 있다는 것, 그것만큼 위로가 되는 것도 없을 것 같다. 인간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외로운 존재지만 공감의 순간만큼은 그 외로움을 잊을 수 있으니 말이다.
사실 '잃어버린 여행가방'이란 제목이 궁금했었다. 독일의 루프트한자라는 항공사에서는 매년 1월 여행객들이 분실하고 찾아가지 않는 여행가방을 공개적으로 경매하는 행사를 갖는다고 한다. 주인이 찾아가지 않는 가방에 비싸고 귀중한 것들이 들어있을 가능성은 적겠지만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훔쳐보고 싶은 인간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기엔 충분한 이벤트일 것 같다.
박완서 선생님 역시 여행가방을 분실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더러운 속옷과 양말이 가득 들어있는, 잃어버린 그 여행가방을 그 누가 열어봤을까 창피한 마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이 육신이란 여행가방 안에 깃들여 있던 영혼을 절대로 기만할 수 없는 엄정한 시선, 숨을 곳 없는 밝음 앞에 드러내는 순간이라는 작가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죽비로 등짝을 내려치는 것처럼, 잦아있는 정신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말씀이다. 책에 담겨있는 많은 여행지들의 기록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겠지만 인생의 여행가방을 내가 아닌 누군가가 열었을 때도 당당할 수 있게 그렇게 삶의 여정을 여행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방 속을 더러운 속옷이나 불필요한 잡동사니들로 채우지 않도록 비워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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