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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그리다

자연과 인간이 조화로운 세상을 꿈꾸다 - 기청산식물원

by 푸른가람 2023.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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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로 한 시간이면 충분한 거리에 있지만 한번 다녀오기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벼르고 벼르던 차에 겨우 기청산식물원의 봄꽃 구경을 하고 돌아올 수 있었다. 막상 떠나면 금방인데 마음먹기가 왜 그리 어려울까. 한겨울 내내 언제 봄이 올까 했는데 어느새 계절은 봄의 절정(絶頂)을 이미 지나고 있었다.

기청산식물원은 경북 포항시 청하면 덕성리에 있는 사설 식물원이다. 서울대학교 임학과를 졸업하고 낙향(落鄕)한 이삼우 원장이 1965년에 과수원을 인수하여 한국향토고유수종연구개발농원을 설립한 이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가꾸어 오고 있다.

이 식물원은 여타의 수목원과는 달리 공원식(公園式) 식물원이 아닌 교육 목적의 박물관식(博物館式) 식물원을 지향하고 있다 보니 아직 일반인에게는 많이 알려지지는 않은 편이다. 게다가 사설 식물원이다 보니 입장료도 만만찮다. 그러나 사전에 예약하면 전문 가이드의 생생한 해설을 들어볼 수 있으니 식물에 관심 있는 분들의 생태체험(生態體驗) 장소로는 안성맞춤이다.

무료로 즐길 수 있는 수목원에 비해 따로 입장료를 받기 때문인지 기청산식물원을 찾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우리 땅에서 자라고 피어나는 나무와 꽃들을 제대로 살펴보고 즐길 수 있는 곳 또한 이곳이다.

봄날의 기청산을 화려하게 치장해 주던 목련이며 벚꽃은 이미 다 져 버렸다. 그 자리를 이제는 완연한 푸른빛이 대신하고 있었다. 나무들이 새로 난 풍성한 푸른 잎들을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이 다시 돌아온 봄을 만끽하고 있는 듯하다. 매년 반복되는 모습이지만 해마다 또 맞이하는 마음이 새삼스럽다.

언제 봐도 반가운 기청산식물원의 초입 풍경이다. 신록이 품어내는 푸른빛이 싱그럽기 그지없다. 오늘따라 인적이 드물다. 이맘때면 단체로 식물원을 찾는 발길도 분주한 법인데 이상스레 고요하다. 익숙한 들머리 풍경을 느린 걸음으로 카메라에 담으며 매표소 앞을 지나려는데 직원분이 ‘월요일 휴관’임을 친절히 알려 주신다.

이 식물원을 찾아온 것이 그동안 몇 번인데 그 사실을 깜빡하고 있었던 것이다. 헛품만 팔고 돌아가야 하나 쭈뼛거리고 있는데 오신 김에 둘러보고 가라는 고마운 허락이 떨어졌다. 휴관 일을 미리 확인하지 않았던 나의 부주의가 오히려 평일 오후에 이 넓은 기청산식물원을 마치 전세 낸 듯 혼자 둘러보는 호사를 누리게 된 셈이다.

몇 해 전 야생화(野生花) 공부를 해볼 생각으로 자주 찾았을 때만 해도 웬만한 꽃 이름은 꿰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마저 가물가물하다. 모습은 익숙한데 이름이 입안에서 맴돌다 만다. 금낭화, 동의나물, 미나리아재비, 애기똥풀, 종지나물, 할미꽃, 앵초, 양지꽃……. 구석구석에 피어난 봄꽃들이 간만에 찾아온 이를 반갑게 반겨주는 듯하다.

푸름 속에 붉은 동백꽃이 유독 눈에 띈다. 강진 백련사의 동백나무숲에서 만났던 무수한 붉은 꽃송이들을 떠올렸다. 지금쯤이면 그곳의 동백꽃은 모두 졌으리라. 마치 이 식물원의 가장 깊은 곳,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숲 속에 외롭게 떨어져 있는 한 송이 꽃봉오리처럼.

머나먼 남도의 땅끝에서 만나는 동백꽃이나 이곳에서 보는 동백꽃이나 반갑기는 매한가지다. 붉디붉은 동백꽃은 가지에 매달려 있을 때보다 땅에 떨어져 그 생명이 사위어갈 때 더욱 강렬한 색으로 불타는 듯하다.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동백꽃을 보며 그 생명이 다하더라도 그 모습이 추하지 않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새삼 얻게 된다.

기청산식물원을 갈 때면 늘 재롱이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렜었다. 여유롭게 구석구석을 걷고 있노라면 어찌 알고 왔는지 어느새 내게 몸을 부비고는 제 기분 내키는대로 사라진다. 관람객을 지키려고 뱀과 맞서 싸우던 기특하고 귀여운 고양이를 더 이상 볼 수 없음이 안타깝기만 하다.


미로정원(迷路庭園)이란 것이 새로 생겼나 보다. 쉼 없이 불어대는 봄바람에 대숲이 일렁인다. 대나무들이 서로 몸을 부대끼는 내는 소리를 들으며 미로를 걸어 본다. 한사람이 겨우 걸어 다닐 만큼 좁은 미로 속은 대낮인데도 어둑어둑하다.

평소에는 관심 없이 지나쳤던 것들에 오늘따라 눈길이 오래 머문다. 높이가 제각각 다른 대나무 기둥, 흡사 달팽이를 꼭 빼닮은 나무 등걸이며, 아련한 그리움과 사랑을 닮은 하트 모양의 나무까지. 몇 해 전 태풍에 쓰러진 아까시나무에는 새로운 생명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마음처럼 자주 올 수는 없지만 나는 늘 이곳을 마음에 담고 그리워한다. 깊어가는 봄날 오후의 노곤한 햇살이 따갑지 않았던 것은 때맞춰 불어주는 바람 덕분이었고, 홀로 걷는 길이 지루하지 않았던 것은 클래식 선율이 발길을 따라 나와 함께였기 때문이었다. 무릉도원(武陵桃源)이 따로 없었다.

기청산식물원의 가장 깊은 곳에서 동백꽃을 만났다. 남도의 땅끝에서 만나는 동백꽃이나 이곳에서 보는 것이나 반갑기는 마찬가지다. 붉디붉은 동백꽃은 가지에 매달려 있을 때보다 땅에 떨어져 그 생명이 사위어갈 때 더욱 강렬한 색으로 불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많은 꽃과 나무를 만날 수 있는 즐거움이 있지만 내게는 이곳에 올 때마다 맛보게 되는 또 다른 설렘이 있다. ‘재롱이’라는 귀여운 이름을 가진 고양이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몇 해 전 처음 이 식물원을 찾았을 때 우연히 내 눈앞에 나타난 이후 내가 갈 때마다 늘 우연처럼 만나게 되는 오랜 친구 같은 녀석이기도 하다.

봄꽃 구경은 못하더라도 녀석은 꼭 보고 갔으면 좋겠다는 내 마음을 재롱이가 알아차렸던가 보다. 식물원 구경을 다 마치고 나오는 길가에 녀석은 언제부터 자리를 잡고 있었는지 곤한 낮잠에 취해 있었다. 얼마 전에 다친 발은 아직 다 낫지 않은 것 같았다. 상처 때문인지 아니면 이제는 늙어버린 육신의 피곤함 탓인지 옆에서 깨우고 머리를 쓰다듬어도 좀처럼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몇 번 눈이 마주쳤지만 귀찮다는 듯 돌아눕는 녀석이 야속하기보다는 그저 안쓰럽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흐르는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는 노릇일 테지. 얼른 기력을 되찾아 뱀과 맞장을 뜨던 예의 용맹함과 식물원 손님들에게 보여주던 재롱을 다시 볼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을 전해주고 기청산의 푸른 숲을 되돌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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