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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 즐거움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 이병률 여행산문집

by 푸른가람 2012.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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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다림 끝에 이병률의 두번째 여행 산문집이 나왔다. 책을 주문하고도 한참을 기다려서야 손에 쥘 수 있었다. 기다림의 연속 끝에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라는 마음에 드는 제목과, 깔끔하면서도 눈길을 끄는 표지를 가진 책을 만나게 된 셈이다. 그리고 그 오랜 기다림의 허기를 채우고 싶었던 것인지 순식간에 읽어 내려갔다.

난해했다. 몇 시간만에 이 책을 읽고 난 뒤의 첫 느낌은 딱 이랬다. 물론 시인의 글에는 수많은 비유와 상징, 축약이 들어 있어서 긴 호홉으로 여러 번을 들여다 보아야만 지은이의 속마음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법이긴 하다. 그의 전작 '끌림'을 통해 시인의 언어에서 느껴지는 신선함에 깊이 매료되었던 내게 이번 책은 확실히 '공감' 면에선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특이하게도 이 책에는 페이지도 없고, 프롤로그나 에필로그도 없다. 책에 담겨 있는 58개의 글들은 각각 독립적이다. 스토리의 일관된 흐름이 있는 것도 아니니 굳이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을 필요도 없다. 마음 내키는 대로 어딘가를 열어서 읽어도 좋다. 읽다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은 훌쩍 뛰어 넘어도 상관 없을 것 같다. 다음에 내가 시인의 눈과 가슴으로 바라보고 느낄 때가 온다면 그때 다시 꺼내서 찬찬히 곱씹어봐도 좋겠다.

 


부러운 사람이다. 시인은 자신의 삶이 만족스러울지 모르겠지만 여행과 사진에 관심이 많지만, 막상 자유롭게 어디론가 떠날 수 없는 나같은 사람들에게 이병률은 그런 존재다. 멀리 떠나서야 겨우 마음이 편하니 이상한 사람. 아무 정한 것도 없으며, 정할 것 또한 없으니 모자란 사람이라 책 표지에선 이병률을 소개하고 있지만 '떠날 수 있고, 마음 속의 새장 속에 뭔가를 담을 수 있으니 행복한 사람'인 것이다.

자기는 없고 언제나 다른 사람만 생각하는 것 같은 사람. 이토록 많이 받아서 영영 받기만 하면서 사는 사람으로 굳어져 버리게 될까 두렵고 어려웠던 사람. 그렇게나마 내 허술한 빈 곳을 가릴 수 있으니 나에게는 축제 같았던 사람. "나이 많은 사람 만나러 나오는데 뭐하러 씻고 나와요?"라고 말해 주는 사람. 작가는 그 사람을 나를 덮어주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참 멋진 말이다. 때로는 이불이 되어 따뜻한 온기를 품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한없이 넓은 마음으로 모자라고 부끄러운 치부를 모른 척 덮어주기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세상 살아가는 것이 한결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다. 문득 누군가 나를 덮어주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보다는 과연 나는 지금 누군가를 덮어주는 사람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지금껏 그러지 못했다면 앞으로는 그럴 수 있을까.

책이 참 예뻐서 자꾸 만지작거리게 된다. 글이 머릿 속에 들어오지 않아도, 가슴을 쿵쿵 울리지 않아도 흰 여백을 채우고 있는 까만 글자들을 좇게 된다. 글과 함께 실려 있는 수많은 그의 사진들을 보면서 잠시 생각해 봤다. 그동안 내가 찍어왔던 수많은 사진 가운데 누군가에게 보여줄 만한 것들이 있었던 걸까. 그래서 그 사진 속에 담겨진 수많은 시간과 기억들을 다른 누군가와 공유할 수 있는 호사스런 행운이 내게도 찾아오기는 하는 걸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들을...

그런데 말이다. 나는 말이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당신이 좋다.


"거기 한쪽에 두고 가. 그냥 내가 바라보게......"
어쩌면 이토록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 말이 생각나는 걸까.
그 말로 정신이 하나도 없는 걸까.
단지 우리가 며칠 머물던 호텔의 건너편 쪽에 앉아 있을 뿐인데.   3# 작은 방을 올려다 보았다

사랑은 사람이 하는 일 같지만 세포가 하는 일이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것도 그 사람이 내뿜는 향기와 공기, 그리고 기운들에 불쑥불쑥 반응하는 것이지 않던가. 사랑은 그래서 일방적인 감정으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은가.  5# 그날의 쓸쓸함

허기를 달래기엔 편의점이 좋다.
몰래, 사람들 사는 향내를 맡고 싶으면 시장이 좋다.
사랑하는 사람의 옆모습을 보기엔 극장이 좋다.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기 위해선, 높은 곳일수록 좋다.
세상 그 어떤 시간보다도,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시간이 좋다.
사랑하기에는 조금 가난한 것이 낫고
사랑하기에는 오늘이 다 가기 전에 좋다.  10#

11월과 12월 사이를 좋아합니다. 그건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삿포르에 갈까요,
이 말은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11#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

나는 너를 반만 신뢰하겠다.
네가 더 좋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나는 너를 절반만 떼어내겠다.
네가 더 커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13#

문득 행복하냐고 묻고 싶을 때가 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기울고 있어서가 아니라
넌 지금 어떤지 궁금할 때.

많이 사랑했느냐고 묻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게 누구였는지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만큼을 살았는지,
어땠는지 궁금할 때.

나를 지나간
내가 지나간 세상 모든 것들에게
'잘 지내냐'고 묻고 싶어서
당신을 만난 거겠다.  14# 묻고 싶은 게 많아서

지금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은 당신밖에 없을 것 같다.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 한 가지가 있다면
당신 앞에서 우는 일.
그래도 우리는 이 생에서 한 번은 만나지 않았는가 말이다.  17#

"만약 네가 원한다면 우리 집에서 지내도 좋아."
"우산 가져 왔어요?"
"또 볼 수 있겠죠?"
"나 대신, 다 다녀줄래요?"  27# 황홀한 말

살면서 모든 것을 털어놓아도 좋을 사람 한 사람쯤 있어야 한다. 그 한 사람을 정하고 살아야 한다. 그 사람은 살면서 만나지기도 한다. 믿을 수 없지만 그렇게 된다.  36# 무조건

어차피 마지막은 마지막이었다.
그렇다라도 그 순간이, 그 장면이 소중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37# 당신이 소중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외롭지 않으면 또 무엇으로 살아요?" 
당신은 그 외로움의 힘으로 가장 멀리 가겠다는 말인가. 훨훨, 당신이 가고자 했던 곳들을 당신은 지독히 밟으며 다닐런가. 어쩌면 우리는 그곳에서 외로움의 힘으로 마주쳐 그렇게 술 한잔 나눌런가.  43# 높고 쓸쓸한 당신

사랑은 삶도 전부도 아니다. 사랑은 여행이다.
사랑은 여행일 때만 삶에서 유효하다. 47# 사랑도 여행이다

하루 한 번쯤
처음 영화관에 가본 것처럼 어두워져라.
하루 한 번쯤, 보냈다는데 오지 않은 그 사람의 편지처럼 울어라.
다시 태어난다 해도 당신밖에는 없을 것처럼 좋아해라.
옆에 없는 것처럼 그 한사람을 크게 사랑하라.  48#

여러 번 말했지만 나는 바보 같은 사람.
여러 번 당신에게 말했지만 나는 멀리 있는 사람.
그러나 당신에게 말하지 않은 한 가지.
당신에게 있어 나는 어쩔 수 없이 불가능한 사람.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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