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풍경을 그리다

오랜 세월 한 몸으로 사랑해 온 연리근 이야기 - 대흥사

by 푸른가람 2023. 3. 8.
728x90

대흥사(大興寺)는 우리 국토의 땅 끝, 해남 두륜산(頭崙山)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사찰로 조계종 22교구의 본사이다. 두륜산은 백두산의 ‘두’와 중국 곤륜산의 ‘륜’을 합친 것인데 대둔산(大芚山)으로도 불렀기 때문에 처음에는 절 이름을 대둔사라 하다가 근대 초기에 대흥사로 바꾸었다. 

대부분의 고찰들이 그렇듯 대흥사 역시 정확한 창건연대를 밝히기는 매우 어렵다. 정관 스님이 426년 대흥사 산내 암자의 하나인 만일암을 창건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544년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처음 절을 세웠다는 주장도 있다. 현재 대흥사에서는 대체로 아도화상의 창건설을 따르는 편인데, 응진전 앞 삼층석탑의 제작연대가 통일신라 말기 경으로 추정되고 있어 늦어도 그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대흥사는 호국불교의 정신이 살아 숨쉬는 도량으로 유명하다. 임진왜란 때에는 서산대사가 거느린 승군의 총본영이 있었다. 지금도 경내에는 스님의 호국 정신을 기리는 표충사(表忠祠)가 남아 개인의 수행 못지않게 국가의 안위를 걱정했던 한국불교의 전통을 전하고 있다. 매년 이곳에서 서산대제를 비롯한 행사가 열리고 있다.

대흥사는 금당천을 경계로 크게 네 개의 구역으로 나뉜다. 대웅보전이 위치한 북원, 천불전이 있는 남원, 서산대사의 사당이 있는 표충사 구역과 새로 당우들이 조성되고 있는 대광명전 구역이다. 대웅보전은 개울 건너에 자리 잡고 있다.

왜란이 끝난 후 서산대사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三災)가 미치지 못할 곳으로 만년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이라 하여 의발(衣鉢)을 보관하면서 대흥사의 중흥기가 시작됐다. 한국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도량으로 자리매김 하게 된 것이다. 

풍담 스님으로부터 초의 스님에 이르기까지 열 세분의 대종사(大宗師)와 만화 스님으로부터 범해 스님에 이르기까지 또한 열 세분의 대강사(大講師)가 배출되었다.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던 암울한 시대상황 속에서 한국불교의 명맥(命脈)을 이어준 축복과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또한, 13 대종사 가운데 한 분인 초의선사 덕분에 대흥사는 우리나라 차문화(茶文化)의 성지로 자리 잡았다. 대흥사 뒤에는 초의선사가 기거하던 일지암이 있고, 매년 초의선사 문화제를 통해 다례를 전파하는 행사가 열린다. 특히나 해남과 강진 등 전남 서남해안의 사찰들에서 초의선사라는 인물을 빼놓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 것 같다. 

대흥사 경내와 암자에는 적지 않은 문화재가 있다.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은 국보 제308호로 지정되어 있고, 보물 제88호 탑산사 동종 등 보물만도 여섯 점이나 된다. 대흥사 도량 전체가 사적명승 제9호로 지정되어 있어 대흥사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말없이 대변(代辨)하고 있다.

해남군에서도 깊은 자리에 있어 한번 가려면 큰마음을 먹어야 한다. 대흥사에 이르는 십리 숲길은 수려(秀麗)함이 여느 숲길에 뒤지지 않는다. 조용히 사색하며 산책하기 좋은 길이다. 가는 길에 있는 유선여관도 유명한 볼거리 중 하나다. 

미황사, 녹우단, 땅끝마을도 같이 둘러보면 좋을 곳들이다. 몇 해 전에는 두륜산 케이블카가 문을 열어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해남의 관광 명소가 됐다. 인근의 강진에는 무위사, 백련사, 다산초당 등도 있으니 해남과 강진이야말로 남도 답사의 일번지요 우리나라 문화유산의 보고(寶庫)라고 불러도 과하지 않을 것 같다. 

문재인 대통령과도 특별한 인연이 있다. 사법시험을 공부하던 시절인 1978년에 8개월 정도 대흥사에 머물면서 정진했던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중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한국전쟁 중에 해남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했을 때에도 이 절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하니 명당은 명당인가 보다. 

사람들로 붐빈다는 건 별로 탐탁찮은 일이다. 미지(未知)의 곳으로 여행을 떠나 그곳만의 특유한 감흥을 간직하고 돌아오려면 번잡스러움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주차장은 관광버스를 타고 온 단체 관광객들로 이미 만원이었지만 다행히 소란스럽지는 않았다.

해탈문에 이르는 길은 걷기에 참 좋다. 군데군데 노란 개나리가 피어 있고 대흥사를 둘러싸고 있는 숲의 품은 넓고 따뜻하다. 그 속을 가로질러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가 시원스럽다. 조금 걸어가다 보면 유선관을 만나게 된다. 유서 깊은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을 수 있는 호사는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대흥사는 산중에 자리한 절 치고는 터가 꽤 넓어 둘러보기에 쾌적하지만 초행자들은 넓은 마당에 서면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렵다. 대흥사는 금당천을 경계로 크게 네 가지 구역으로 나뉜다. 대웅보전이 위치한 북원, 천불전이 있는 남원, 서산대사의 사당이 있는 표충사구역과 새로 당우들이 조성되고 있는 대광명전 구역이다. 

먼저 찾은 곳은 천불전이었다. 높은 지대에 있는 천불전은 남원(南院)의 중심 법당이다. 이름 그대로 천개의 불상을 모셔 놓은 곳이다. 천불전에 모셔진 불상들은 경주의 불석산이란 곳에서 나오는 옥석을 가져와 열 명의 스님들이 무려 여섯 해에 걸쳐 완성했다고 한다. 그 정성이 실로 대단하다 하겠다.

6년에 걸쳐 천불을 다 만들자 세 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해남으로 출발했는데 도중에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일본의 나가사키현으로 흘러갔다고 한다. 옥불(玉佛)이 가득 실린 배를 본 일본 사람들이 절을 지어 모시려 하자 그들의 꿈에 불상들이 나타나 “우리는 해남 대둔사로 가는 길이니 여기에 머물 수 없다.”고 해 결국 모든 불상이 대흥사에 안치된 것이 순조 18년(1818)이었다는 이야기다. 일본을 다녀온 불상 768구의 어깨나 좌대 아래에는 일(日)자를 써 따로 표시해 두었다고 하니 무심코 보아 넘겼던 천불전의 불상에서도 결연한 불심이 느껴진다.

천불전을 나오니 대웅보전 앞이 무척 분주한 모습이다. 얘기를 들어보니 주한 외교사절 가족들이 이곳에서 1박2일 템플스테이 행사를 한 모양이다. 아마도 그들에게는 천년고찰에서의 하룻밤이 분명 좋은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산사에서 파란 눈의 이방인들을 만나는 느낌이 오히려 생소하게 느껴진다.

대웅보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반듯하고 당당한 건물로 조선 현종 8년(1667)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무려 사백 년 가까이 된 건물이다. 대웅보전 현판의 필체가 눈에 익다 싶었더니 동국진체를 완성한 조선 후기의 명필 원교 이광사의 작품이라고 한다.

이광사가 쓴 현판에는 추사 김정희와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온다. 추사는 제주도에서 8년간 유배생활을 했는데 그때 대흥사 주지가 추사와 무척 절친했던 초의선사였다. 제주로 가던 중 대흥사에 들러 하루를 묵었는데, 그때 대웅보전에 걸린 이광사의 글씨를 보고 “이광사는 조선의 글씨를 망쳐놓은 사람인데 어찌 그의 글을 대웅보전에 걸어놓을 수 있냐”면서 초의선사에게 버럭 화를 냈다고 한다. 

높은 지대에 있는 천불전은 남원(南院)의 중심 법당이다. 대흥사 천불전은 우리나라 천불전 건물을 대표할만한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높은 기단 위에 서 있는 건물의 비례와 단청의 화려함이 돋보인다. 2013년 8월에 보물 제1807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는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는 현판 글씨를 하나 써서 바꿔 달게 하고는 제주로 떠났다. 이후 추사는 유배지에서 고초를 겪으며 추사체를 완성하고, 문인화의 최고봉이라는 걸작 <세한도>를 남기게 된다. 8년 뒤 유배가 풀려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러 초의선사를 만난 추사는 초의선사에게 대웅전 현판에 걸린 자신의 글씨를 떼고 이광사의 글씨를 다시 걸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겸양(謙讓)과 배려(配慮)의 미덕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이 절은 순천에 있는 송광사의 느낌을 많이 닮았다. 송광사처럼 금당천 개울을 건너 대웅전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원스러운 계곡에는 맑은 물이 쉼 없이 흐르고 다리를 건너면 피안의 세계에 다다를 수 있는 구조다. 공주 마곡사 역시 절이 물줄기로 나뉘어 있어 절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청량함이 떠오른다. 

대흥사의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가 바로 연리근이다. 수령이 오백 년이 훨씬 넘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이 느티나무는 높이가 20미터에 둘레는 4.4미터에 달한다. 왼쪽이 음(陰)의 형태를, 오른쪽이 양(陽)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허물어지는 언덕에 돌로 축대를 쌓고 보토하여 느티나무의 뿌리를 보호하고 있다. 앞에는 작은 나무들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 지나는 이들의 시선을 끈다. 

연리(蓮理)는 두 나무가 가까이서 자라다가 서로 겹쳐져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한다. 뿌리가 하나 되면 연리근, 줄기가 겹쳐지면 연리목, 가지가 하나로 만나면 연리지라고 부른다. 리(理)자는 나이테를 의미한다.

연리라는 말은 중국 당나라의 시인 백낙천의 시에서 연유했다. 재위 초기 성군(聖君)으로 불리며 당나라의 전성기를 열었던 현종이었지만, 경국지색(傾國之色) 양귀비와 사랑에 빠져 정사를 소홀히 한 탓에 혼군(昏君)으로 전락했다. 안록산의 난을 피해 도망치던 길에서 호위하던 무장(武將)들이 나라를 혼란스럽게 한 양귀비의 처벌을 요구하자, 어찌할 도리 없이 그녀를 죽이고 말았다고 한다. 이후 백낙천이 현종과 양귀비의 비극적인 사랑을 7언 120구의 장편 서사시 <장한가(長恨歌)>로 지었으니 이 시로 인하여 사람들 사이에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칠월칠일 장생전에서 함께 즐길 때,      七月七日長生殿
야밤삼경 남모르게 주고받은 말이지요.   夜半無人私語詩 
하늘에선 비익조가 되기를 원하고요,     在天願爲比翼鳥 
땅에서 연리지가 되기를 원했어요.       在地願爲連理枝 
천지가 장구해도 다 할 때 있으련만,     天長地久有時盡
면면한 이 한 만은 그칠 날이 없으리라.  此恨綿綿無絶期

이 장한가에서 나온 말이 ‘비익조(比翼鳥)’와 ‘연리지(連理枝)’다. 비익조는 암수가 눈과 날개가 하나씩이어서 짝을 지어야만 날 수 있다는 새이고, 연리지는 두 나무의 가지가 닿아 하나의 몸이 되었다는 나무를 뜻한다. 흔히 부부를 상징하는 말로 쓰이는데 보통 ‘비익연리(比翼連理)’라고 한다.

뿌리가 하나로 붙은 연리근은 소원을 들어주고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속설이 있어 사람들이 길조(吉兆)로 여겨 귀하게 여긴다. 그래서인지 이 절에서도 108일 동안 연리근 아래 연등을 걸어두며 기원하는 의식을 따로 마련해 두었나 보다. 흔히 이런 나무를 두고 부모와 자식의 사랑, 연인의 사랑에 빗대어 사랑나무라 부르는데 대흥사의 느티나무 연리근도 오랜 세월을 그렇게 한 몸으로 사랑해 왔으리라. 늘 한자리에서 변함없는 마음으로 서로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흥사 연리목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