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 칠 때 떠나라지만...'끝판대장' 오승환의 晩時之歎
“박수 칠 때 떠나라”고들 합니다. 모든 이의 칭송과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당당히 돌아서는 그 모습은 또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적일까요. 커리어의 정점에서, 혹은 아직은 충분히 힘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도 그 자리를 누군가에게 비워주고 떠나는 모습은 현생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꿈이기도 할 겁니다. 물론, 다른 생각을 가진 이도 많을 겁니다. 누군가에겐 아름다운 퇴장일 수 있는 선택이 또 다른 누군가에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거나, 도전정신이 부족한 모습으로 비쳐질 수도 있습니다. 아직 충분히 힘이 남아 있는데도 떠나는 것은 비겁한 선택이 될 수도 있겠죠.
우리 프로야구의 사례를 살펴 보더라도 상반되는 선택들을 우리는 많이 보아 왔습니다. 전자의 대표적인 경우로 ‘국보급 투수’, ‘무등산 폭격기’, ‘나고나의 태양’ 등 수많은 별명과 화려한 수식어를 남긴 대투수 선동열을 얘기할 수 있습니다. 선동열을 두고 많은 전문가들이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투수라고 칭송했습니다. 선수 역시 그 칭송에 걸맞는 활약을 해줬습니다.
일단 국내 프로야구 통산 기록을 살펴 보면 1985년 데뷔해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 1995년까지 11년 동안 146승 40패 132세이브를 올렸습니다. KBO 11시즌 동안의 평균자책점이 믿기지 않겠지만 1.20에 불과했습니다. 데뷔 초기에는 선발 투수로 활약했고, 이후 오승환이 등장하기 전까진 불멸의 마무리로 이름을 날렸죠. 선발로든 마무리로든 마운드에 오르면 상대 타자들에게는 저승사자 그 자체였습니다. 68번의 완투와 29회의 완봉승을 기록했고 무려 1,698개의 탈삼진을 빼앗았습니다.
일본에서도 주니치 드래곤즈의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며 우승의 주역이 되기도 했습니다만 첫 해였던 1996년은 최악의 부진을 겪기도 했습니다. 아마 시절부터 수많은 국가대표 경력을 쌓으며 국제 무대 경험이 많았던 선동열이었고 말 그대로 엘리트 코스만 걸어온 그였기에 일본 리그 첫 해의 경험은 그야말로 생경했을 겁니다. 선동열의 1996년 5승 1패 3세이브 평균자책점 5.50이라는 믿기지 않는 기록을 남깁니다. 스스로 납득하기 어려운 시즌이었을 겁니다. 천하무적 선동열이 일본에서 통타당하던 모습은 국내 야구팬들에게도 엄청난 충격과 공포를 안겼습니다.
절치부심했던 그는 엄청난 훈련과 노력 끝에 이듬해인 1997년 다시 부활했습니다. 1승 1패 38세이브를 올렸고 평균자책점은 1.28을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선동열의 위용을 되찾은 것이죠. 3승 29세이브 평균자책점 1.48, 1승 2패 28세이브 2.61 네 시즌 동안 10승 4패 98세이브 평균자책점 2.70을 통산기록을 남기고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여전히 1군 무대에서 충분히 통할 만한 위력적인 공을 던지고 있었지만 스스로 멈출 시간을 선택했습니다. 주변에서도 은퇴를 만류할 정도였지만 그의 결정은 확고했습니다. 최고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이 평소 지론이었다는 겁니다. 37세의 나이에서 전성기와 같은 활약을 보여주기는 어렵다는 냉혹한 현실을 받아들인 것이었겠지만 확실히 최소 1, 2년 정도는 현역 연장이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었습니다.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선택이었고 그의 평소 지론 역시 존중해야 합니다. 본인의 커리어의 마지막을 어느 시점으로 결정할 것인가 하는 것은 본인의 선택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지만 문제는 이후 그의 지론이 우리 프로야구의 대표적인 레전드들의 야구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입니다. 삼성 감독 시절 양준혁에게 은퇴를 종용한 것이나 KIA 감독으로 옮긴 뒤 이종범의 옷을 벗긴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들의 은퇴가 전적으로 선동열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지만(그들의 기량 저하 역시 객관적인 팩트였지만 1군 엔트리의 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할 정도로 부진한 것은 또 아니었습니다) 팬들에게 큰 아쉬움과 선수들에게 큰 상처를 준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죠.
이번에는 반대의 사례를 얘기해 보겠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례들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강렬한 추억이 있는 이만수 선수를 예로 한번 들어볼까 합니다. 이만수 선수는 프로야구 최고의 레전드 선수 중 한명이죠.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안타, 타점, 홈런을 기록했던 ‘1호의 사나이’였고, 역대 한국야구를 대표하는 공격형 포수로 손꼽히는 선수입니다. ‘헐크’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하고, 팬들의 엄청난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선수였습니다.
1982년 프로 원년부터 삼성 라이온즈에서 뛰기 시작해 16년 동안 활약하며 1,449경기에 출장해 1,276안타252홈런 861타점을 통산 타율도 3할대에 육박하는 .296을 기록했습니다. 노쇠한 선수 말년의 기록을 제외하면 통산 타율 3할을 충분히 기록하고도 남았을 겁니다. 타율 2할8푼9리 22홈런 70타점을 기록한 1992년까지가 실질적인 주전급 선수였고 1993년부터 에이징 커브를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만40세였던 1997년 타율 2할3푼1리 2홈런 9타점의 기록으로 은퇴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은퇴를 두고 엄청난 후폭풍이 몰아 닥쳤습니다. 선수는 현역 연장을 원했지만 구단은 은퇴를 요구했습니다. 구단의 강제 은퇴 움직임에 팬들이 집단행동 움직임을 보이며 갈등은 더욱 증폭되었고, 극단적인 상황 일보 직전에서 이만수 선수가 홀홀단신 자비를 들여 미국 연수를 떠나는 것으로 일단 갈등은 봉합됐습니다만 이 사건이 결국 삼성 라이온즈와 이만수와의 인연을 끝내게 만들었죠. 이후 이만수는 친정팀 삼성으로의 복귀를 원했지만 상처만 더 깊어진 셈입니다.
야구선수 이만수의 인기는, 특히 대구에서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전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대구팬들은 경기 후반이 되면 경기 스코어에 상관 없이 연신 ‘이만수’를 연호했고, 이는 삼성 감독들에게는 어지간히 부담이 될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대타 이만수가 안타를 치건, 삼진으로 물러나건 대구팬들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스타 이만수를 그렇게라도 야구장에서 보고 싶었고, 그 결과에 관계없이 아낌없는 박수를 이만수에게 보냈던 것입니다.
물론, ‘박수 칠 때 떠나라”는 격언의 ‘박수’가 단순히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최정상의 자리에서 모든 아쉬움을 내려놓고 깔끔하게 그만 두라는 얘기지요. 추한 모습 보이지 말고 멋진 모습, 아름다운 기억들만 간직하고 싶은 마음일 겁니다. 이만수 선수 역시 왜 그런 마음이 없었을까요. 하지만 그는 늘 이야기 했습니다. “내가 현역 생활을 더 하고자 하는 이유는 개인적인 욕심 때문이 아니다. 충분히 능력을 펼칠 수 있는 나이인데도 너무 빨리 현역에서 은퇴하는 프로야구의 관행이 아쉽고, 공정한 경쟁을 통해서도 노장, 베테랑들이 더 열심히 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그것이 내가 프로야구 후배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었죠.
물론, 그것이 선수 개인의 욕심을 애써 포장한 것인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프로 원년부터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부와 명예를 다 누렸던 선수가 한 두 해 더 현역으로 뛰면서 얼마나 많은 연봉을 더 받을 수 있었을까요. 혹자는 말합니다. 한 선수의 노욕으로 인해 젊은 선수들, 2군에서 피 땀 흘리는 선수들이 뛸 수 있는 자리가 사라진다는 말이죠. 물론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만수 선수가 한 이야기의 전제는 충분히 공정한 경쟁을 통해 이길 수 있을 때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삼성의 레전드 선수이니 나에게 주전 자리를 보장해 달라 이런 얘기가 아니죠. 젊은 선수들과 공정하게 경쟁해서 내가 엔트리에 들 수 있을 정도가 되면 뛸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고, 그러한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겁니다. 물론 구단 측의 이야기는 또 많이 다르긴 합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선수요, 야구보단 종교가 더 중요한 선수라는 비난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1997년의 이만수 은퇴 파동을 계기로 이만수 선수와 개인적 친분을 갖게 되었고, 팬들이 조직적으로 구단과 싸움을 벌이는 과정에도 참여했습니다. 그래서 이만수 선수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었고 이 일을 계기로 삼성 라이온즈와 이만수 선수와의 인연이 아름답지 못한 결말을 맺은 것 또한 지금까지도 무척 아쉬운 일입니다. 가끔 이 때의 일을 다시 떠올려 보곤 합니다.
이 때 야구선수 이만수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말입니다. 다른 평번한 선수들처럼 구단의 요청을 받아들여 지도자 연수를 다녀온 후 삼성의 코치, 이후 감독으로 인연을 이어갔으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구단 측에서 컨트롤하기 부담스러운 레전드급 선수를 감독으로 앉히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삼성 라이온즈의 행보를 보면 확연히 드러납니다. 이만수 이후 양준혁, 이승엽 등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들이 많았지만 그 누구도 삼성 라이온즈의 부름을 받은 이는 없습니다.
서론이 무척 길었습니다만 오늘 이 이야기를 하는 건 오승환 때문입니다. 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마무리 투수라고 할 만한 ‘끝판대장’ 오승환. 한국 무대는 좁아서 일본 프로야구 한신 타이거즈에서 2년간 80세이브를 기록하더니, 야구의 본고장 MLB에서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토론토 블루제이스, 콜로라도 록키스 등에서 42세이브(45홀드)를 올리며 한미일 프로야구 삼국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선수입니다. 이 기록은 앞으로도 깨어지기 힘든 기록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난공불락의 요새와도 같았던 오승환이었지만 그 역시 인간이었습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하잖습니까. 천하의 오승환에게도 한계는 분명 존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그 한계의 시간이 언제 도래하느냐였고, 1982년생 오승환은 현재 무려 43세로 현역 선수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2019년까지의 메이저리그 생활을 정리하고 국내 복귀 결정을 한 것이 2020년이었습니다. 불법 해외원정 도박 혐의로 국내 활동정지 징계가 풀린 이후 년 만에 국내 프로야구에서 오승환의 투구를 볼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 설렜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2020년 18세이브를 올리며 국내 무대 적응을 하더니 이듬해 무려 44세이브, 평균자책점 2.03으로 전성기 못지 않은 활약을 선사합니다. 명불허전 끝판대장으로서의 위용을 여전히 이어가는 모습이었죠. 분명 전성기에 비해 구속 저하와 구위가 예전 같지 않다는 평가는 있었지만, 일본과 미국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타자들을 상대하는 노련한 면모가 더해져 세월의 무게를 이어가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역시 오승환이다는 얘기가 나왔고, 그의 나이를 지적하는 언론의 인터뷰에도 항상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며 자신감을 비쳤던 오승환이었습니다.
2024년 전반기까지도 좋은 흐름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중반 이후 분위기가 급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타자를 압도하는 구위를 회복하지 못하자 삼성 라이온즈의 코칭스탭은 결국 결단을 내렸습니다. 보직 변경이었죠. 마무리 투수에서 필승조로, 그러다가 다시 추격조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죠. 부진은 시즌 후반 내내 이어졌고 결국 반등의 계기를 잡지 못한 채 포스트시즌 엔트리에도 들지 못하는 굴욕을 당하고 맙니다.
천하의 오승환이었기에 팬들은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었지만 결국 그렇게 시즌은 저물고 맙니다. 27세이브를 기록했지만 5점대에 근접한 평균자책점(4.91)으로는 1군 무대에 잔류하기 어려웠습니다. 2025년 시즌 역시 그 흐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2군에서 시즌을 시작한 오승환은 6월 6일 NC전에 선발 레예스가 초반에 무너진 틈을 메우기 위해 4회 마운드에 올랐습니다. 투아웃 까지는 잘 막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2사 이후 출루를 허용한 후 천적 김주원에게 큼지막한 홈런을 허용하며 강판당했습니다.
또 한번 삼성팬들은 타오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중요한 타이밍에 오승환을 올린 감독의 선택에 대한 비난, 오승환의 기량 부족에 대한 질타, 레전드 선수에 대한 과도한 비난에 대한 불만 등이 어우러져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죠. 이러한 흐름은 오승환의 부진한 피칭, 코칭스탭의 무리한 승부처 기용이 맞물리는 시점마다 무한반복되고 있습니다. 팬들또한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죠.
과연 이 시점에 오승환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질문에 대한 정확한 판단은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선수 본인의 판단이 중요하겠죠. 그리고 주변의 조언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공을 받아주는 불펜캐쳐, 곁에서 지켜보는 투수코치들의 역할이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더 이상 프로 1군 무대에서 뛸 수 있는 기량과 체력이 아니라면 과감하게 내려올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개인적인 의견을 표명하자면 2021년 시즌을 마치고 오승환은 팬들의 아쉬움 속에 은퇴하는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늦어도 2023년 시즌이 끝난 시점을 넘겨서는 안됐습니다. 물론 그때까지도 오승환은 불펜투수로서 나름의 역할을 충실히 해줬습니다. 삼성의 암흑기에 돌아와 무너진 전력 속에서 팀 승리를 지켜내기 위해 애쓴 공로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그 이후는 욕심이었다고 보여집니다. 팬들과의 아름다운 이별을 꿈꿨지만 이제는 조금 늦은 감이 있습니다. 그 끝이 언제일지는 모르겠으나, 반드시 그 끝은 존재할 겁니다. 바라건대 그 마지막이 너무 아프지는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안타깝습니다. 우리들의 영광스러웠던 한 시대의 가장 당당한 주역이었던 오승환의 마지막이 너무 초라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