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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그리다

일흔일곱에 지은 우암의 공부방, 남간정사

by 푸른가람 2012.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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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로 남간정사를 찾았다. 개인적으로 우암 송시열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사진으로 본 남간정사의 실제 모습을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마치 봄날같았던 햇살 덕분이었는지 다행히도 남간정사의 기억은 따뜻하게 남아 있다. 바위를 흐르는 계류 위에 놓여져 있는 남간정사는 언제가 될 지 모를 첫 건축의 모델이 될 수 있을만큼 매력적이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남간정사와 기국정이 사이좋게 놓여 있고 그 앞에는 연못이 공간의 여백을 채워준다. 그리고 그 연못 가운데 작은 섬을 만들고 나무를 심었다. 이것은 신선이 산다는 전설의 봉래산을 상징하는 우리 전통 조경의 정형이기도 하고, 집이 들어설 자리의 풍광을 중요시하는 기호지방 성리학자들의 성향을 엿볼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담장을 따라 한바퀴 돌아보다 연못 언저리에 잠시 앉아 남간정사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절로 편해짐을 느낀다. 조금은 삭막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는 겨울 풍경이 이 정도인데, 계류를 따라 흐르는 물소리가 풍부해지고, 주변이 푸른 신록으로 가득찰 때 쯤이면 이루 형언하기 힘든 풍만감을 안겨줄 것이 분명하다. 




송시열 건축의 특징은 바위를 통해 형상화 된다. 송시열이 지은 집은 대부분 바위를 타고 앉아 있다. 강경의 팔괘정은 거대한 바위 옆에 있고, 화양동 계곡의 암서재는 바위 꼭대기에 앉아 있는 형국이다. 우암이 나이 일흔일곱에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하자마자 흥농촌의 능인암 아래에 지은 집이 바로 남간정사다.



함성호는 '철학으로 읽는 옛집'을 통해 송시열이 바위를 통해 무엇을 표상하고 싶었는 지를 설명하고 있다. 송시열의 성리학적 주제는 곧을 '직(直)', 단 한 자로 요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직'이라는 개념의 사상적 근원은 송익필에게 있고, 이후 김장생을 거쳐 송시열에게 이어지는 유가적 삶의 태도를 말함이며, 직은 곧 의리와 절의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정사(精舍)라는 것은 원래 인도어의 비하라(Vihara, 승려들이 수행하던 동굴이나 나무 밑)를 중국어로 번역한 말인데, 우리말로 얘기하자면 일종의 공부방 개념이다. 우암의 나이 77세에 공부방을 짓고 그 이름을 그가 평생에 걸쳐 존경해마지 않았던 주자의 시구에서 따 왔는데 양지바른 개울이란 뜻이다.




배움에 끝이 없다고는 하지만 죽음을 앞둔 마지막 순간까지도 공부방을 지은 노학자의 열의에는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 끝에 한 시대를 풍미했으나 수많은 유학자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었고, 그로 인해 그의 말년은 비참했을 지언정 그가 세운 남간정사에서만은 학문에의 끝없는 열정과 건축을 자연의 일부로 환원한 여유만을 본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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