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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그리다

우주 만물의 배꼽(omphalos)을 꿈꾼 우암 송시열의 팔괘정

by 푸른가람 2012.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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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김장생이 말년을 보낸 임이정에서 서북쪽을 바라보면 나즈막한 산자락에 팔괘정이라는 정자가 자리잡고 있다. 팔괘정은 우암 송시열이 그의 스승이었던 김장생과 가까이 있고 싶다는 마음으로 임이정 바로 지척에 지은 정자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팔괘정은 임이정과 무척 많이 닮아 있다.



흡사 보면 쌍둥이처럼 보일 정도로 구조적으로 흡사하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형태도 그렇고, 두 칸에 마루를 놓고 나머지 한 칸을 벽으로 막아 온돌을 들인 구조도 임이정과 같다. 어차피 이번 여행이 '철학으로 읽는 옛집'에 소개되어 있는 옛집들을 찾아 나선 여행이니만큼 이번에도 건축가 함성호의 설명을 들어봐야 할 것 같다.



그는 조선의 건축은 사실 똑같다고 얘기하고 있다. 조선의 집은 어떻게 생겼느냐가 아니라 어디에 위치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다. 조선 건축은 지형과 지세를 포함한 지리적 차원에서 이야기되어야 하는 거시적 안목을 필요로 한다고 한다. 이해하려니 무척 어렵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좀더 넓고 깊은 것을 포괄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니 말이다.



임이정이 탁 트인 정상에 놓여 외부에서나 내부에서나 탁 트인 전망을 보인다고 한다면 팔괘정은 교묘하게 숨어 있는 형국이다. 직접 두 곳을 가보면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남을 느낄 수 있다. 팔괘정은 북쪽의 커다란 바위 아래 가려져 있는데 그 바위에 새겨져 있는 글자들의 의미도 깊이 새겨볼 필요가 있다.



송시열은 정자 이름에 자신의 욕망을 함축해 놓았다고들 한다. 팔괘정이라는 이름 역시 마찬가지다. 팔괘란 주역에서 만물을 상징하는 64괘의 기본이기 때문에 우암은 팔괘정이란 정자를 우주의 만물이 함축되어 있는 배꼽(omphalod)으로 여겼다는 뜻이 된다. 과연 조선 후기 사상계와 정치계를 주도했던 우암 송시열의 폭과 깊이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팔괘정 뒷쪽의 바위에는 우암이 직접 새겼다는 청초암과 몽괘벽이란 글자가 있다. 몽괘에서 몽이라 함은 생명이 태어난 지 얼마되지 않은 신생의 상태를 말한다. 단순하게 보자면 어리고 어리석다는 뜻이다. 지금은 몽매함과 어둠 속에 있지만 곧 스스로를 발전시켜 지혜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음을 얘기한다 하겠다. 봄을 상징하는 청초라는 말 역시 이러한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결국 이 팔괘정은 스승의 가르침을 마치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받아들여 성장하고자 하는 포부를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이와 김장생, 김집으로 이어지는 조선 예학의 적통을 이어 받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 바로 이 작은 정자에 숨어 있는 것이다. 다만 임이정처럼 사방에 트여있지 못함이 이후 우리 역사의 아픔으로 이어진 것 같은 아쉬움을 안고 팔괘정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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