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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그리다

따뜻하고 평안했던 '다각적 추론의 집' 명재고택

by 푸른가람 2012.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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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함성호의 '철학으로 읽는 옛집' 마지막에 명재 윤증고택이 소개되어 있다. 지난해 이른 봄에 충남 일대를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목적지 중의 한곳에도 이 오래된 옛집이 포함되어 있었다. 관촉사 은진미륵을 뵙고 오느라 지체했던 탓에 짧은 겨울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어 다음으로 미뤄야 했었던 그날의 아쉬움을 1년이 지난 후에야 풀 수 있었다.




명재고택을 찾았던 날은 마치 봄날 같았다. 한낮 햇볕의 너무나 따뜻했던 그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듯 하다. 홀로 걷고 있어도 누군가가 옆에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햇볕을 받아 온기가 감도는 마루에 앉아 오래된 나무의 감촉을 손으로 매만지며 그 따뜻함을 만끽하던 찰나의 행복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오래되고 말없는 것들이 사람에게 건네는 그 따뜻함은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다. 마음을 표현하려 있는 말 없는 말 다 끄집어 내보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그들은 또 그렇게 말없이 타이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 말 없이도 얘기할 수 있고, 교감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르려면 또 얼마나 긴 세월이 필요할 것이며 마음 공부가 필요할런지.





내가 당도했을 때 이미 명재고택은 카메라를 든 한무리의 사람들에게 내어져 있는 듯 했다. 그들은 마당과 집을 전세낸 것처럼 휘젖고 다녔고 그 시간만큼은 고택의 주인인 것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배운다고 했던가. 나는 그들에게서 몇해 전 사진을 처음 시작하면서 무리지어 다니던 나의 옛 모습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부끄러워졌다.




함성호는 책에서 명재 윤증고택을 다각적 추론의 집이라 설명했다. 다분히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철학적 사유가 담겨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 이유에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정확히 표현하자면 여러 스승 가운데 한명이었던 노론의 거두 우암 송시열에 맞서 소론의 젊은 영수 역할을 맡아야 했던 윤증의 운명과 연관지을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사문난적이라는 이름으로 성리학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허용치 않았던 편협함과 그것을 거스릴 경우 죽음까지 감수해야 했던 시대의 잔인함을 다시금 끄집어 내야 하는 것은 불편한 일이다. 그 어떤 말로 변명한다 하더라도 분명 노론 300년은 정치적, 학문적으로 조선시대 후반을 암흑기로 내몰았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생각이 다르면 쓰지 않으면 그뿐이지, 어찌 조정에서 사람을 죽이는가?" 평생을 초야에 묻혀 학문에만 전념하다 겨우 몇년의 짧은 벼슬살이 끝에 윤휴가 사약을 받으며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말에 대한 대답을 우암에게서 듣고 싶어진다. 윤증 역시 윤휴의 죽음을 보며 스승 송시열의 주자학적 종본주의에 염증을 느꼈을 것이고 새로운 사상과 세상을 염원했을 것이다.




명재고택의 사랑채인 리은시사(離隱時舍)는 사대부의 당당한 기품과 더불어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집이다. 나는 감히 집에서 풍수를 논할 수도 없거니와 그 속에 담겨진 성리학적 사유를 이해할 수도 없다. 하지만 전국의 여러 이름난 고택들을 다녀보면서 그 집안 나름의 독특한 분위기를 느껴보게 되는데 이 곳은 딱딱한 격식과 규율 보다는 편안함이 느껴져서 좋다.





리은시사라는 말은 용이 세상에 나올 때는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때를 기다려 나옴을 말한다고 한다. 보통의 사랑채들이 재(齋)나 당(堂)이라는 이름을 쓰는 데 반해 명재고택의 사랑채는 특이하게도 사(舍)라는 당호를 썼다. 함성호는 리은시사라는 이름에 담긴 뜻을 주역을 통해 다각적인 추론으로 이끌어 냈다. 





명재고택을 얘기하면서 빼놓아서는 안될 것이 있다. 그것은 흔히 '노블리스 오블리제'라 하는 지식인, 가진 자의 도덕적 책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윤증 집안은 흉년이 들면 마을에 공사를 일으켜 그 노임으로 쌀을 지급했고, 추수 때면 나락을 길가에 두고 배고픈 마을 사람이 가져가도록 했다 한다.




그런 가풍이 있었기에 이후의 격동기에도 이 집안에는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뿌린만큼 거둔다고 하지 않던가. 리은시사 바로 옆의 넓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장독대는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풍요워진다. 그 수많은 장독 속에서 맑은 물과 깨끗한 소금에 녹아들며,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명가의 가풍처럼 정갈한 장이 만들어지고 있을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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