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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그리다

비와 안개에 젖은 늦가을의 부석사

by 푸른가람 2011.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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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어둑어둑한 새벽길을 달려 부석사에 도착했습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분주해지기 전에 부석사의 고즈넉함을 즐기려다 보니 어느새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운이 좋으면 부석사에서 멀리 태백산맥 너머 떠오르는 붉은 일출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이따금씩 내리는 빗줄기는 잦아들 줄을 모릅니다.




이렇게 이른 시간이면 모처럼 공짜 구경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했는데 부지런하신 매표원 아저씨는 빈틈을 허용치 않습니다. 매표소를 지나면서 만나게 되는 부석사의 대표 이미지 가운데 하나인 은행나무 가로수길입니다. 바로 옆으로는 잘 익은 사과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사과밭이 풍요로운 느낌입니다.





매년 결심을 하곤 합니다. '올 가을엔 노랗게 물든 부석사의 은행나무숲을 꼭 보고 말리라.' 그러나 매번 이렇게 때를 놓치고 맙니다. 올해도 이미 은행나무잎들은 나무가지를 떠나 길위에 소북하게 쌓여 있습니다. 겨울을 저만치 앞둔 계절처럼, 나뭇잎들도 자신을 노랗게 불태우고는 태어났던 땅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는 듯 합니다.



부석사는 비와 안개에 갇혀 있습니다. 부석사를 수십번은 다녀갔지만 이렇게 이른 시간에, 또 이렇게 신비로운 풍경을 만나게 되는 건 처음입니다. 푸른 가을 하늘 아래 부석사의 모습을 담아갈 수는 없지만 뭔가 꿈꾸는 듯 몽환적이면서도 마음마저도 저만치 내려놓게 만드는 그런 날의 부석사를 마음에 담아갈 수 있어서 한편 다행이란 생각도 드네요.



날이 좋으면 좋은대로, 또 궃으면 궃은대로 그 모습을 즐기면 그만입니다. 짙은 안개로 시야를 허용치 않더니 어느 순간 하늘이, 산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이 모습은 강원도 전방에서 군생활하면서 1,000미터가 넘는 끝없이 이어진 능선 아래를 휘감고 돌던 운무를 바라보던 그 날 이후 참으로 모처럼 맛보는 황홀한 감동이었습니다.




무량수전 앞마당에서 안양루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으니 이제서야 비로소 유홍준 교수가 얘기했던 부석사의 장쾌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부석사 제일 높은 자리에서 자연이 선사하는 최고의 풍경을 바라보던 이날의 행복을 앞으로도 잊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 아름다운 모습은 그야말로 찰라의 순간만큼 짧습니다. 겨우 몇분의 시간이 지나면 눈앞에 펼쳐지던 황홀경은 다시 안개에 묻혀 버리고 맙니다.




아쉽지 않습니다. 어차피 마음이라는 필름에 담은 이미지를 사진으로 오롯이 표현해 낼 재주는 없으니 그 모습 그대로 눈으로, 마음으로 담아 두었으니 충분합니다. '1박2일'이 부석사를 다녀간 이후, 그리고 회전문 공사가 시작된 이후 부석사를 찾는 것이 부담스러웠었는데, 찾는 이의 발걸음이 뜸한 악천후 속 새벽녘의 부석사는 제 기억 속 부석사다운 모습이었습니다. 



모든 나무들이 잎을 떨구고 겨울 채비를 하고 있는데 마지막 남은 단풍나무가 안개에 젖은 나뭇잎들을 흔들며 배웅을 해주는 듯 합니다. 이날의 부석사는 비와 안개에 젖었지만 저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고요함과 풍요로움에 젖어 부석사를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속세에서의 삶도 이날처럼 촉촉히 젖을 수 있다면 참 좋을텐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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