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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그리다

서늘한 가을바람 속 향기로 남아있는 지리산 천은사

by 푸른가람 2011.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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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이 닿았더라면 아마도 일년 전에 천은사를 찾았을 것이다. 이제서야 이렇게 좋은 곳을 알게 된 것이 아쉬울 정도다. 지리산의 넉넉한 품 속에 안긴 듯 자리잡고 있는 지리산 천은사는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있어야 할 것은 다 갖추고 있는 넉넉한 절이라는 느낌이 든다. 지금껏 전해 내려오고 있는 구렁이 설화가 이 고찰의 오랜 역사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듯 하다.



천은사는 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의 말사로 전남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 지리산 서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화엄사, 쌍계사와 더불어 지리산 3대 사찰로 손꼽힐 정도다. 신라 흥덕왕 3년(828년)에 인도의 덕운 스님이란 분이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가 전국의 명산을 찾아 다니다 이곳에 천은사를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창건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천은사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는데 간단히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원래 절 이름이 감로사였는데 조선 숙종 5년인 1679년에 단유선사가 이 절을 중수할 무렵에 절의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이때 한 스님이 용기를 내 구렁이를 잡아 죽였는데 이후 절의 샘에 물이 솟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샘이 숨은 절'이란 뜻의 천은사로 절 이름이 바뀌었는데 문제는 절의 이름을 바꾸고 크게 중창했지만 화재가 나는 등 불상사가 자주 발생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수기를 관장하는 이무기를 잡아 죽인 탓이라고 수군거렸는데 이후 조선시대 4대 명필 중 한명으로 칭송받는 이광사가 이 곳을 찾았다가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물이 흘러 떨어지는 듯한 필체로 지리산 천은사란 현판을 써주고 일주문에 걸면 다시는 화재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신기하게도 사람들이 그대로 따라 했더니 이후에는 절에 불상사가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이광사의 물 흐르는 듯한 특이한 필체의 현판이 일주문에 붙어 있다. 문외한이 보더라도 참으로 특이한 필체가 아닐 수 없다. 오랜 역사와 더불어 구렁이 설화가 전해 내려오는 천은사는 그래서 더 신비롭게 느껴지는 듯 하다.



절의 느낌은 단아하면서도 고풍스럽다. 화엄사 같은 크고 웅장한 느낌은 들지 않지만 깊다고 해야 하나, 하여튼 그런 느낌이 드는 절이라서 좋다. 극락보전과 팔상전을 지나 관음전에 오른다. 관음전 뒷편에 한참을 앉아 서늘한 가을 바람을 즐기던 그날의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다. 풀 내음이며, 시원한 숲 내음이 시시때때로 다양한 향으로 마음을 푸근하게 만들어 주었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좀더 오래 이 곳에 머물러 있을 걸 그랬다. 그 평온한 시간, 무심히 흘러가는 흰 구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시간마저 멈춰버린 듯 했다. 세상에서 가장 요염한 다람쥐가 이따끔씩 그 고요함을 깨워주었던, 조금 이른 가을날의 천은사를 아마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극락보전 앞에는 백일 동안 붉은 자태를 뽐내는 백일홍이 마지막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천은사에는 내가 좋아하는 향기가 있다. 그 맑고 은은한 향기가 내가 머물렀던 구석구석에 지금도 온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다음에 천은사를 찾게 된다면 난 또 그 향기에 취해 한참을 관음전 뒷편에서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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